인문추상, Next Page
안현정 (미술평론가, 예술철학박사)
“세상의 모든 책을 하나의 화면에 담을 수 있다면…” 이 말도 안 되는 상상은 ‘지식의 총아(寵兒)’라 불릴만한 ‘엄미금’의 인문추상에서 가능하다. 어린 시절부터 책에 관심을 보인 작가는 민화의 중시조로 불린 조자용,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이 이끈 민학회(民學會)를 만나면서 삶의 변곡점을 맞는다. 한국적인 에너지를 인문학에서 찾고 답사를 통해 삶의 경험으로 체화했던 방식, 예술미와 문화미를 하나로 종합하는 시대정신은 작가의 신작 위에 고스란히 뿌리내렸다. 책을 쌓고 펼쳐 재결합하는 방식은 다층적 경험이 모여 단순화된 작품의 변화과정과 닮았다. 초기부터 ‘책거리의 변주’에 관심을 가진 작가는 도제식 교육으로 유명했던 ‘에꼴 드 가나(école de Gana)’에서 ‘자신만의 개성화’ 길을 발견했다.
“작품을 구상하고 스케치하고 그리는 나의 창작 패턴은 비슷하지만, 그 작품 속에 담기는 생각과 가치는 계속 변화해 왔고, 항상 다양한 관점으로 융합하여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키려고 노력했다. 서양의 ‘큐비즘’과 동양의 ‘책가도’의 공통점을 찾아 끊임없이 분해하고 재해석하다 보니 어느새 미니멀에 가까운 사유적 추상에 다다랐다.”
역원근법과 다시점을 강조한 책가도에 흥미를 느낀 것은 ‘인문학적 원형’을 가진 책을 바탕 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책의 큐비즘을 통해 기존 정서의 해체 외에도, 깊은 원형발굴을 통한 자기 정체성의 변주를 획득한다. 실제 박사과정에서 고려불화의 배채법(背彩法)을 연구한 작가는 책가도를 원형 삼은 추상화의 과정 안에 색과 색이 연동되어 나오는 ‘레이어의 구조’를 한국미의 근간으로 삼는다. 전시 제목인 《The Page》가 작가의 오늘을 상징한다면, ‘Next Page’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지향하는 자기혁신의 추상화를 의미한다.
책가도를 원형 삼은 ‘추상의 깊이’
작가의 초기 책가도에서도 역원근법을 바탕삼은 추상적 구성을 쉬이 찾을 수 있다. 책과 서가(書架), 방안의 기물을 함께 그린 책가도는 십장생도·작호도(까치호랑이 그림) 등과 함께 민화의 대표적인 장르이다. 흔히 책거리그림 또는 서가도·문방도·책탁문방도 라고 불리는데, 여기서 ‘거리’는 복수를 나타내는 우리말 접미어다. 화면 속에 책과 관계없는 갖가지 일상용품들이 어우러져 ‘선비의 사랑방’을 꾸미는 ‘문인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작가는 이렇듯 책가도의 추상적인 구성 속에서 민화가 가진 현대적인 모티브에 주목했다.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를 강조한 문인(文人)의 미감 속에서도 공간성을 무시한 평면구성으로 현대적 세련미를 놓지 않은 장르이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엄미금의 주제는 ‘책’이었다. 작가는 “이해와 통찰력을 주는 책은 나의 스승”이라며 “책은 내 지식의 곳간이고, 내 상상력의 날개”라고 고백한다. 책의 이미지들을 마구잡이로 형상화하지 않는다. 작가는 아이디어의 근간을 르네상스 시기의 피렌체 최대 서적상이었던 베스파시아노 다 비스티치(Vespasiano da Bisticci, 1422∼1498)에서 찾는다. 무려 천여 권이 넘는 필사본을 제작·판매한 다 비스티치는 인문주의자들의 토론 속에서 자신을 정의했고,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그의 필사본을 상상하는 일은 책 그림을 구상하고 화면을 형상화하는데 원동력이 되고 있다. 작가는 “Al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작가로서의 ‘정체성과 원천성(identity and originality)’을 어떻게 창의적으로 지켜낼 것인가”를 고민한다. 영혼까지 복제당하고 프로그래밍 되는 현실 속에서 결국 ‘나다운 예술’은 정제된 인문학적 사유 속에서 인간다움의 가치를 창의적 에너지로 기록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작가의 추상은 인문정신이 담긴 책의 본질을 아름다움의 본질 속에서 지켜나가는 것이다.
인문색(人文色), 감성으로 써내려간 시(詩)
모던민화를 바탕한 색면추상의 어법들 위에 '초기 회화작업'부터 진화를 거듭해 단순화된 '기하학적 색면회화'가 눈 앞에 펼쳐진다. 작가의 초기작업을 책가도에 바탕한 원형에의 탐구라고 한다면, 다른 대상을 의미화하면서 반복적 패턴을 선보인 분할된 구조의 합들은 추상 이전의 확장적 그리드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일루전과 비정형적 옵티컬리즘을 추구한 오늘의 작업들은 ‘픽션(책가도)’을 원형삼은 다학제적 성찰을 통해 새로운 ‘인문추상’의 길을 개척한다. 큐브연작으로부터 출발한 오늘의 작업들은 ‘인문색의 관계들’로 요약된다. 과거를 해체하고 현재를 재해석해 자연과 공간, 빛을 아우르는 기하학적 복합 추상 형식을 꾀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엄미금의 조형방식은 기초에 충실한 무한 상상의 세계를 통해 ‘우리의 인식틀’을 무한대로까지 확장 시킨다.
책을 단순화한 감성을 머금은 색면이 서가에 쌓이듯 하나둘 관계를 형성한다.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의 화면을 책으로 옮긴 듯, 캔버스 위로 과감하게 꽂힌 네모난 색면들은 ‘책을 통한 지적체험’을 시적 울림으로 전달한다. 로스코가 스타일의 원형을 마티스의 <붉은 화실>(1911)에서 찾았다면, 작가는 로스코의 색과 형태에서보다 ‘감성을 캔버스에 담는 자유’를 인문추상의 근간으로 삼는다. 책에 집중하려면 외연을 지난 저자의 심상으로 파고들어야 하듯, 우리는 엄미금의 색면(혹은 책면)으로 들어가 고요하고 명상적인 색의 여운과 만난다. 실제로 작가는 2000년대 <어린왕자>를 콜라보한 작업들 속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외형적으로는 알만한 대상을 브랜딩한 것이지만, 이는 작가가 평생을 두고 좇았던 사랑·우정·행복과 같은 인간 본성을 향한 단순한 깨달음이 자리한다. 작가는 ‘뜻대로 된다’는 <여의(如意)> 시리즈에서 행복을 기원하는 ‘쌍희(囍=Double Happy)’를 선보인 바 있다. 그림을 통해 의미를 보고, 뜻하는 바를 기원하는 그림들 속이 ‘현대민화’의 바탕을 마련한 것이다. 작가의 추상은 갑작스런 전환이 아니라 휴머니티를 바탕 한 의미화(意味畵) 과정이자 ‘깨달음의 시화(詩畫)’라고 할 수 있다. 민화가 선조들의 생활그림 이었듯이, 엄미금의 추상들은 ‘책가도의 동시대적 변용’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에 익힌 정보와 기술을 재맥락화하는 작가의 시도는 책을 필사하고 이에 자신의 견해를 찬(讚)하던 서가 문화의 오늘을 보여준다. 작가의 인문추상은 우리의 오늘을 담은 문화미(文化美)의 발현이자, 끊임없는 자기혁신을 통한 작가정신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끊임없이 다양한 책 그림을 그리면서 옆도 보지 않고 나만의 작업에 골몰했다. 자연히 내 기준으로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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