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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성필, Origine: 원시향

채성필의 흙 그림, 모든 본질적 근원이자 생명의 시작점

김윤섭(숙명여대 겸임교수, 미술사 박사)

 

예술의 본질은 국경과 사상을 초월한다. 특히, 채성필 작가가 사용하는 흙이란 재료는 모든 이들에게 공통 분모의 감성적 교감과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근원적 원성’을 지닌 요소이다. 채 작가에게 있어서 재료는 물성임과 동시에 표현하고자 하는 본질이기 때문이다. 마침 이번 전시 제목은 ‘원시향’이다. 채성필 작가는 전시 제목에 ‘근원의 향기 ― 原始香’ 혹은 ‘멀리서 바라보는 고향 ― 遠視鄕’이란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여기에 ‘본질을 향한 작가적 신념’의 의미를 더해 ‘原視向’으로도 해석하면 어떨까 싶다.

 

채성필의 본질에 대한 탐구는 흙에서 시작해서 흙으로 정리된다. 흙이란 재료는 가장 근원적 공감대에 대한 물음의 답을 찾는 최적의 요소이다. 굳이 성경 창세기의 ‘흙으로 빚고 영을 불어넣어 최초 인간을 창조했다는 종교 혹은 신화적 이야기’를 빌지 않더라도, 흙은 인류사 출발의 정점이다. 가령 UN도 2015년을 ‘세계 토양의 해’로 지정했고, 우리나라 역시 생명의 근원인 흙의 소중함을 되새기고 보전하기 위해 같은 해 3월 11일을 ‘흙의 날’ 법정기념일로 제정했다.

흥미로운 점은 3월 11일을 ‘흙의 날’로 제정한 사연이다. 우선 ‘3’은 농사가 시작되는 시기인 3월로써 ‘하늘(天)+땅(地)+사람(人)’을 포함한다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다. 숫자 ‘11’ 역시 한자의 뜻을 빌어 ‘10(十)과 1(一)을 합해 이뤄진 흙(土)’을 뜻하며, 대지에 싹이 나거나 형상을 세운 모양과도 닮았다. 공교롭게 한글 ‘흙’이란 글자는 획이 8획이라, 동양에서 ‘필 발(發)’자와 발음이 똑같아 예로부터 길한 의미로 여겨진 기운까지 품고 있다. 결국 흙이란 소재는 인간이 발을 딛고 서서 우주를 만나게 되는 시작점이자,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되새기는 접점일 수밖에 없다.

 

“경계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경계는 이곳과 저곳을 구분하는 동시에 만나는 곳이다. 또한 생성과 변화의 에너지가 머무는 곳이기도 하다. ‘나’라는 창작의 주체가 인위적인 행위로 작업하지만, 그 행위를 통해서 자연이란 원초적인 요소를 다룸으로써 화면이란 가상공간에 창조적인 또 다른 자연을 구현해 낸다. 마치 태초의 세상이 열리고, 음과 양의 조화, 오행의 상극과 상생에 의해서 자연이 만들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채성필의 그림은 화면 안에 만들어지는 또 하나의 창조적 자연의 형태를 보여 준다. 채 작가의 작업은 크게 흙과 물 시리즈로 나눠볼 수 있다. 원초적 형태의 대지가 연상된다. 최소한의 행위와 작가적 간섭으로 새로운 질서를 화면 위에



만들어낸다. 그 결과물들은 생명력이 돋아난 듯한 황색이나 녹색을 띠기도 하고, 생명 잉태의 근원인 ‘물’ 시리즈를 고유한 청색 톤으로 보여 주기도 한다. 간결하지만 밀도감이 충만하고, 고요하지만 생동감이 일렁이는 양가적 화면의 구성력이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

채성필에게 블루는 ‘대지를 품은 바다’이고, ‘땅의 역사를 지켜본 하늘’이다. 마치 하늘 위에서 본 물의 흐름을 시각화한 듯한 조형 어법이 인상적이다. 대지를 핏줄처럼 가르는 물길들은 그대로 생명의 줄기와 같다. 그것은 하루하루의 변화되는 시간이 축적된 기록이며, 쌓여가는 우리 역사의 결을 대변한다. 캔버스 위에 물감 대신 흙을 뿌리고, 인위적인 붓질이 아닌 우연성과 시간성을 통한 자연의 체온까지 담아 생명성의 맥박과 리듬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대학 시절 우연히 흙에 빠져든 채 작가는 한국화와 서양화의 경계를 넘나들고, 동서양의 미감을 융합시킨 독창적인 그림으로 국제적인 주목을 얻고 있다. 특히 그의 그림은 2천 년 전의 고구려벽화나, 삼국시대 단청, 수천 년 전의 고대 인류도 사용했던 흙이란 그림 재료를 가장 현대적으로 재활용한 롤 모델로 여겨진다. 전통적인 재료 기법을 떠나 보는 재미와 읽는 재미의 다양한 조형적 요소들이 함축된 덕분이다.

작가적 행위와 재료가 혼연일체가 되어 대상과 의식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을 연출해 낸 화면은 한 편의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듯하다. 사방으로 뻗친 수많은 파편의 흔적은 마치 우주 탄생의 비밀을 지닌 빅뱅의 기록을 연상시킨다. 또한 어머니의 품속을 닮은 대지 위에서 펼쳐지는 일필휘지 기운생동의 춤사위이고, 장쾌한 희로애락의 인생사 대서사시이다. 이는 물의 초상, 익명의 땅, 대지의 몽상, 흙과 달 등의 작품 제목으로 그동안 천착해 온 ‘흙의 파노라마’를 선보이는 것이다.

특히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흙과 달>이라는 작품에 담아냈다. 마치 작업실 창을 통해 바라본 보름달처럼, 그 안의 흙과 대지에 스민 그리움의 기원은 우리의 마음속의 담긴 이상향에 대한 노스탤지어(nostalgia)와 다름없을 것이다. 채성필의 그림은 익명의 땅으로 시작해 대지에서의 몽상을 거쳐, 자연 속 물길의 역사를 따라 오늘과 내일을 걷고 있는 셈이다. 또한 모든 생명이 지닌 생성과 변화의 에너지가 머무는 경계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채성필은 한 화면에 여러 색을 한꺼번에 사용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는 한국화를 전공하며 체득한 ‘수묵 정신’의 실천이기도 하다. 동양에서 수천 년에 걸쳐서 ‘먹’(墨)이라는 한 가지 재료로 세상의 모든 색을 품은 ‘현(玄) 정신 미학’을 구현해 온 구도적 정진의 과정인 셈이다. 결국 채성필에게 흙은 모든 본질적 근원이자 생명의 시작점인 동시에, 만물의 색을 품은 먹과 같은 역할의 존재와 같다. 채성필의 작품에는 ‘근원에 대한 향기, 그리워하는 궁극의 고향, 본질을 향한 작가적 탐구와 신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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